돌아온 김저기입니다. 오늘은 다소 무겁고, 무서울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지난해 5월, 모두를 놀라게 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63세의 엄마가 장애가 있는 38세의 딸을 살해한 사건인데요. 38년간 애지중지 키운 딸을 엄마는 도대체 왜 죽이게 된 것일까요. 첫돌이 지나자마자 딸은 의료사고로 인해 뇌전증과 지적장애를 얻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막중한 책임감으로 평생을 함께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에게 대장암이라는 큰 병이 찾아온 걸 알게 되었습니다.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딸의 생명력은 점점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오롯이 딸만을 보살피면서 인생을 보낸 엄마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아이와 함께 생을 마치기로 결심하고 아이를 보내고 자신도 수면제를 먹었다가 6시간 만에 가족들에게 발견되어 엄마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비극적인 사건인데요. 이 사건을 담당했던 재판부의 판결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아무리 어머니라고 하더라도 딸의 생명을 처분하거나 결정할 권리는 없다. …” 이 대목을 보고 난 후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다면, 그 권리는 누구에게 있을까.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유명한 명언 중, “인생은 B(Birth, 탄생)와 D(Death, 죽음) 사이의 C(Choice).”라는 말을 많이 들어 보셨을 거예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수많은 선택을 합니다. 그 선택에 따라서 삶이 윤택해지거나, 비루해지거나, 슬프거나, 행복해집니다. 하지만, 태어남은 선택할 수 없죠. 인간의 탄생은 친부와 친모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탄생을 선택한 부모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걸까요. 그건 위에서 예시로 들었던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인간이라도 다른 인간을 죽일 권리는 가질 수 없습니다. 다만, 예외는 존재하는데, 그 예외가 바로 ‘안락사’ 입니다.
네덜란드, 스위스, 벨기에 등 몇몇 국가에서는 ‘안락사’가 법으로 제정되어있습니다.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려 생명 유지가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생물 혹은 사람에 대하여 직간접적으로 고통 없이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행위”를 ‘안락사’라고 합니다. 안락사는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의사의 직접 시술로 사망에 이르는 ‘적극적 안락사’, 의사에게 처방받아 환자가 직접 삶을 마감하는 ‘조력 존엄사’, 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연명치료를 중단해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존엄사’ 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2018년에 소극적 안락사, 일명 존엄사법, ‘연명의료결정법’이 법제화되었습니다. 최근에 SBS <동상이몽 2 - 너는 내 운명>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오연수, 손지창 부부가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연명치료 거부를 위해 보험공단을 방문하는 모습이 그려져 쟁점이 되었습니다. 아직 50대의 건강한 부부가 벌써 마지막을 준비하는 게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의료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인간의 수명은 늘어났습니다. 옛날에는 환갑까지 살기가 쉽지 않아서 만 60세가 되면 마을 잔치를 벌였을 만큼 특별하게 지냈는데요. 환갑을 넘기는 건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 요즘엔, 환갑은 생일처럼 넘어가고 칠순 잔치를 제대로 벌이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절대적인 수명이 늘어난 만큼 건강 수명이 늘어난 것 같지는 않아요. 2030 청년층의 암 발병률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치매 등 정신 질환을 앓는 인구수가 점점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저에게도 치매를 앓고 있는 외할머니가 한 분 계십니다. 투병 생활을 한 지 벌써 10년이 넘으셨죠. 엄마의 남매들이 돌아가면서 할머니를 돌보고 있어 다행히 안전하고 안락하게 지내고 계십니다. 이모와 외삼촌, 엄마가 간병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행스러운 마음이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했습니다. 만약에 나이가 들어서 치매에 걸린다면 나는 가족에게 간호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떠올라서 말이죠.
누구에게나 본인의 노후를 책임져 줄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는 건 아닙니다. 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 건강 문제 혹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자살을 생각하는 노인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필연적으로 수명이 늘어나면서 건강상의 문제와 경제적인 문제가 생기는 것이죠. 몸은 쓰는 만큼 닳게 되니 건강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고, 언제 죽을지 모르니 죽기 전까지 얼마의 금액을 쓸 것인지 가늠해서 모아놓기도 쉽지 않습니다. 어렵게 ‘자살’을 선택하는 대신, 합법적으로 자신의 마지막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준다면 어떨까 하는 발칙한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부작용은 있을 수 있습니다. 무분별하게 죽음을 강요당하지 않을까, 쉽게 마지막을 결정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시선이 있는 건 당연합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여러 기관의 협조가 필수로 따라와야겠죠. 사회적인 합의도 필요하고요.
아름답게 살아가야만 하는 삶은 유한합니다. 유한이라는 건 언젠가 끝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 끝을 알지 못하는 현재의 삶이 저는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눈앞에 맞닥뜨린 삶을 치열하게 사느라 인생 스토리의 엔딩, 죽음을 깊이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 같아요. 언젠가 병에 들어서 죽기도 하고 사고로 죽기도 하죠. 예측할 수 없는 게 인생입니다. 그렇다고 막 살 수는 없잖아요? 미리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면, 사는 것만큼 죽음도 아름다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작고한 이외수 작가가 생전에 말한 ‘자살’의 정의를 되새겨보며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목숨이 자기 소유물임을 만천하에 행동으로 명확히 증명해 보이는 일. 피조물로서 경거망동. 생명체로서의 절대 비극. 그러나 가장 강렬한 삶에의 갈망.” 한해 한해 나이를 먹을수록 신체적, 인지적 기능이 정상적으로 기능할 때, 친지와의 마지막 인사, 가족과의 마지막 인사를 나눌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깁니다. “안녕히 계세요.”라는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는 죽음이 찾아오는 행운이 제게도 오기를 오늘도 기도하겠습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