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가 소녀를 발견한 건 옥상에서였다. 당연했다. 영주가 갈 수 있는 곳은 옥상뿐이었으니까. 영주가 사는 빌라의 작은 방과 담배를 피우러 가는 옥상. 그게 영주의 세계의 전부였다. 담배를 사러 편의점에 가는 것은 장거리 여행이었다. 옥상에 올라갈 때마다 영주는 거기에 아무도 없기를 바랐다. 사람의 능력치가 개발되는 일은 신기해서, 언젠가부터 영주는 옥상에 아무도 없을 ‘기운’ 같은 걸 느끼게 되었다. 누구한테 말해도 믿지 않을 테지만. 그러니까 그날도 그랬다. 분명 아무도 없을 강력한 기운이 옥상으로부터 느껴졌는데. 옥상에 소녀가 있었다. 난간을 잡고. 5층짜리 작은 빌라에서 뛰어내려서 한번에 성공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아니 그것보다, 소녀의 나이가 열 살 남짓 되어 보였다. 소녀는 작은 사람이었다.
—
영주를 방에 있게 만든 것, 그건 기억이었다. 잊었던 날들이 비수같이 떠오르곤 했다.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기억할 수 없어야 마땅한 아주 오래 전의 일들이, 아주 작은 인간이었을 때의 일들이 떠올랐다. 너무 잘 기억하는 병. 영주는 자신이 그런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공부해야지.
만약 신이 나타나, 어린 시절 기억 속에서 어른의 말 하나를 지울 수 있노라고 한다면, 영주는 그걸 지울 것이다. 자물쇠 없는 감옥이었던 방과, 엄마의 ‘사랑’으로 가득한 간식 접시도 함께.
아니다.
이 씨발년아.
부모의 싸움 속 칼날 같던 욕설들을 지울까. 그 말들을 들으면서 문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자기 모습도.
후자가 한번에 상처를 내는 칼날이었다면, 전자는 사람을 조금씩 죽이는 독소 같았다.
그러니까, 영주는 태어난 게 잘못이라고 느꼈다. 열 살의 어느 날 수업 시간이었다. 영주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날 먹은 아침을 다 게워냈다. 때는 봄이었고, 교실에서는 선생님과 반 친구들이 한 목소리로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를 부르고 있었다. 다정하고 따뜻한 노래 가사가 영주를 할퀴는 것 같았다. 스스로에게, 행복한 말들을 하나도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따뜻하지 마! 다정하지 마. 괴로우니까.
영주는 자기 괴로움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엄마도 분명 영주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괴로워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선생님은 어린이가 미래의 희망이라고 했다. 집에는 정말로, 영주에게 자신의 미래를 투사하는 어른이 살았다. 그러니까 괴로움을 느끼는 영주 자신은, 잘못 태어난 존재였다.
짓누르는 괴로움은 영주에게 찾아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견디는 시간들도 반복되었다. 학원 가는 길의 놀이터, 화장실 타일 무늬 속에 숨어 있는 그림들. 그런 것들이 영주를 견디게 만들어줬다. 나이를 먹어 갈수록 영주는 괴로움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조금씩 인간은 세상이 좆같다는 걸 받아들이는 어른이 되어 가는 거지. 영주는 청소년기를 그렇게 기억하곤 했다. 어린이일 때 죽고 싶었다는 걸, 어른이 되고 나서는 다들 잊는다. 영주처럼 너무 잘 기억하는 병에 걸린 사람들 말고는.
어린이들은 사라지고 싶어한다. 어른들의 세상에서.
영주는 다 기억했다.
—
소녀는 난간 바깥으로 발을 내밀던 참이었다. 소녀와 영주의 눈이 마주쳤다. 영주는 자신이 너무 잘 기억하는 병에 걸린 것도, 자신이 히키코모리가 된 것도, 옥상밖에 갈 곳이 없었던 것도 다 이 순간을 위해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영주의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영주는 확신했다. 자기 고통이 소녀를 살리기 위한 거라고.
가지 마.
사라지지 마.
죽지 마.
아주 오래되고 간절한 말이 영주에게서 터져 나왔다. 기억 속 괴로워하던 작은 사람을 향하던 말. 무겁다고 생각했던 그 말들은, 아주 가벼이 공기를 타고 날아갔다. 난간 위의 소녀에게로. 소녀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
[후기]
어른에게
내가 만든 연극 속에서, 어린이들은 어른들의 세계를 떠난다. 어린이 시절의 괴로움을 잊은 어른들이, 어린이들을 위한 세계를 만들 수 있을까 하고 질문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이 되었어도 지워지지 않는 폭력의 말들이 있다. 그 말들을 품은 채 어른이 되었다면, 당신과 나는 생존자다. 고통의 언어로부터 어린이들에게 닿는다면, 어른은 어린이의 세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른이 어린이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의 세계가 거기에 있음을 안다면.
어린이에게
태어난 걸 잘도 축하하면서, 왜 살아 있는 걸 축복하지 않을까. 살아 있는 걸 축복하는 방식으로 어린이들에게 말 걸고 싶다. 이 구린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축하할 바에야, 이왕 태어났으니 살아 있는 걸 축하하자. 존재를 축하해. 어린이들아.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세상은 구릴지언정 당신은 분명히 반짝인다. 그러니 어린이들, 당신의 눈동자에 치얼스.
잡말레터 S3 7호. 난간 위의 소녀 (류소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