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공간에 나 따위가 아무리 유려하고 아름다운 글을 적어 내려간다고 하여도 이 낱낱의 글자들은 나와 10여 년을 함께 산 반려(묘)와는 무관한 일일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그가 깊이 관여하여 힘과 영감을 보탰다 할지라도, 당신은 당신이 읽고 있는 활자들 사이에 남아있는 내 반려의 하찮고 리드미컬한 꾹꾹이[1]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랬다면 이 글의 완성도를 조금은 더 올려치기 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알기로 꽤 많은 인간은 귀여움에 곧 잘 현혹되며 내 반려의 솜방망이[2]는 만만찮게 귀엽기에 글의 설득력을 높이는데 충분한 기여를 했을 것이다. 애당초 이 글은 내 반려와는 무관한 일. 반려는 이 글을 몇이 읽고 그중 몇이 비난을 하고 몇이 칭찬하든 간에 그에 맞춰 자신의 그르렁[3]거림을 유달리 키우거나 줄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한낱 숫자나 평판 따위에 관심이 없으므로.
그는 묘(猫)이고, 난 인(人)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고 하더라도 반려(인)에 대해 다 알 수 없다 하듯이 나 역시 내 반려(묘)에 대해 다 알지 못한다. 그래도 내 반려와 내가 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더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침대에 누워 내 팔을 베고 마주하는 그의 눈빛에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읽어 내고 그때마다 그 사랑에 깊이 감응하고야 만다. 모두가 모든 반려(인)(견)(묘)(자,축,인,묘,진,사,오,미,병자호란,휠체어,엘리베이터,스마트폰,자동차,로봇,식기세척기,엘리트,넷플릭스,티모시샬라메,데우스엑스마키나)에게서 같은 것을 느끼는지까지는 내가 다 알 수 없기에 흩어지는 글자들 사이에서 겨우겨우 두 음절을 붙잡아 여기에 매어둔다. 아마[4]
재작년 가족여행 가는 길에 나는 헤밍웨이? 아니, 로렌스 애니웨이? 아니, 도나 해러웨이? 아니, 아아, 수나우라 테일러의 『짐을 끄는 짐승들』[5]을 읽고 있었다. 책 표지를 쓱 훑던 나의 혈육이 물었다. 너는 너를 동물이라고 생각하냐? 무뚝뚝한 질문에 구태여 답하지는 않았다. 아니, 응, 했던가? 다만 나의 또 다른 혈육에게 장애가 있기에 동물해방과 장애해방이라는 책의 부제가 다소 의식되기는 했다. 어쨌든 그때까지 나는 스스로를 인간 동물이라 칭해본 적이 딱히 없었고 나의 반려를 비인간 동물이라 생각해 본 적도 크게 없었다. 마치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고양이는 고양이. 야~옹.[6] 하지만 자본이나 계급에 대해서는 익숙한 방식으로 더러 생각했다. 평균 2, 3년을 산다는 길고양이와 10여 년을 넘게 살 수 있다는 집고양이의 생에 대해서.
『고기로 태어나서』[7]를 읽은 뒤에도 고기로 태어난 (그러한 취급을 받게 되는) 동물들의 살점을 꼭꼭 씹어 삼킨다. 못 먹으면 좋으련만 잘도 넘어간다. 먹을 때마다 나는 (아마) 사이코패스인가 생각하기는 한다. 그래도 덜 착취하는 방법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떳떳하지 못하여 떨리는 동공으로 매일 밤 반려와 눈인사를 나눈다.
『동물권력』[8]에는 2017년 8월 7일 서른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찬텍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수어(책의 본문에는 수화라고 되어있음)로 의사소통할 줄 아는 오랑우탄 찬텍. 단어를 150개나 구사하며, 가르쳐주지 않은 단어는 스스로 조합해서 케첩을 토마토-치약이라 부를 줄 알고, 햄버거를 치즈-고기-빵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는 그는 몸집이 커지고 빨라졌다는 이유로,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등등의 이유로 더 이상 미국 국립보건원과 국립과학재단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8년을 넘게 함께 살았던 마일스와 헤어지게 된다. 영장류 연구센터로 마일스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찬텍은 “엄마, 차에 가자, 집에 가자”라고 말했다. 마일스가 그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묻자, 그는 “마음이 아프다”고 답했다.
찬텍에 앞서, 이른바 ‘종간 교차 양육’ 실험의 첫 번째 사례로 등장하는 침팬지 구아의 경우 켈로그 부부의 10개월 된 아들과 남매처럼 지내며 함께 크다가 1년이 안 되어 연구가 갑작스레 중단된다. 아들이 침팬지를 지나치게 따라 하게 된 것이 걱정되어 켈로그 부부가 그만두었다고 한다. 침팬지가 인간을 따라 하는 것은 괜찮아도 인간이 침팬지를 따라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아이러니.
찬텍은 애틀랜타동물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자신을 ‘오랑우탄 사람’이라 말했던 찬텍은, 그곳의 동료 오랑우탄들을 ‘오렌지색 개’라고 불렀다. 찬텍은 오랑우탄 특유의 의사소통 방법을 몰랐고, 찬텍과 수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존재도 그곳에 없었다. 이 글 안에서 나는 나를 ‘아무개’[9]라 부르기로 한다. 무엇이 인간인가? 잘 모르겠는 채로 지금처럼 여력이 생길 때에만 무엇이 되고 싶은가에 대해 같잖게 생각해 보는 나로서는 비인간 동물에 대해서는 그저 모른다고. 그러니 동물 아닌 비인간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른다고 답할 수밖에.
아니다. 그래도 티라노 사우르스? 아니아니. 티모시 모턴의 『저주체』[10]나 그레타 거윅의 레이디 버드? 아니, 아니. 그레타 가드의 『비판적 에코페미니즘』[11]에서 힌트를 좀 찾아볼 수 있을까? 하여 책을 펼치자마자 그 위에 식빵 자세[12]로 떡하니 자리 잡을 나의 반려 때문에 나는 글자들을 미처 읽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식빵 반려(묘) 위에 나는 아니, 아니, 아무개는 아마 발을 올릴 것이다. 활자들이 적힌 종이 위로 괴발개발 생각들만 떠다니고 말 것이다. 아마 둥둥. 아니, 멍멍[13]
잡말레터 S3 6호. 괴발개발[14]─아니, 아마, 아무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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