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와 땅’에 관해 써달라고 부탁받았을 때 마침 두산아트갤러리 <점멸하는, 혹은 그렇지 않은>(신재민 기획) 전시를 봤다. 황예지 작가의 사진 작품 하나가 인상 깊었다. 형광등이 들어오는 어둑한 공간 사진을 배경으로 그 위에 실타래 같은 하얀색 선이 드로잉 되어 있었다. 선의 시작점에서부터 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게 꺼내지 못한 말, 정념이 뭉개지듯이 움직이다 결국 매끈하며 어딘가에서 똑 끊겨버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 들으니 단원고 4.16 기억교실에서 촬영된 것이라 했다. 나는 그 작품의 사진을 찍고 전시 감상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가볍게 썼다. ‘애도와 참사의 빈자리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전시! 임시로 열렸다가 사라지는 곳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런데 ‘오래 머물렀다’니. 나는 나중에 내가 쓴 글을 보고 아주 흉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내가 갤러리에서 그 작품을 보고 서 있었던 시간은 5분이 채 안 됐을 것이다. 작품에 대한 충분한 감상일지는 물론이고 참사의 의미를 반추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그럼에도 오래 머물렀다는 건 무슨 뜻인가. 전시장에 들어서 시각적으로 정보를 파악하고, 작품의 기획을 해석한 후, 그럼에도 혹시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것이 있는지 다시 살피면서, 기호로 다가온 해석을 다시 어떻게 전유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것. 이 모든 과정을 5분 안에 끝내고는, 다음 작품으로 넘어갈 수 있었음에도 넘어가지 않았다는 뜻이다. 왜? 좋았다는 걸 몸으로 표현하고 스스로 느끼기 위해. 그걸로 충분한지? 충분할 수도 있고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충분하다면, 혹은 충분하지 않다면 왜? 어찌 됐든 5분이라는 절대적 시간 앞에서 자신이 형편없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도 세월호 참사에 관한 글을 썼다. 히스테리안 출판사의 『애도하는 귀』(유은 저)에 실린 「다 카포」라는 소설이다. 내 글이 어떻게 읽혔으면 좋을지 생각해 보면, 특정한 감상으로 귀결되는 걸 바라지 않고 각자의 감상으로 이 글 안에서 오래 머물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내 글에서 머물기를 바라는 시간은 얼마일까. 25분 정도? 한 인간의 시간을 25분이나 훔치겠다고? 돌아보니 괘씸한 생각이다. 남의 작품에는 5분도 안 쓰면서! 참사와 재난을 생각하면, 그것에 대해 글을 쓰자고 하면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다. 제발 관심 좀 가져. 다른 말로 쓰자면 제발 여기에 머물러 일까. 시간은 다분히 개인적이고 상대적이기 때문에 오래라는 게 얼마일지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5초만, 1분만, 2시간만, 혹은 11년만! 그렇게 소리쳐 붙잡아봤자 사람이 어딘가에 머문다는 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다. 당사자들이 그 사건에서 머무르지 않을 수 없듯이, 머무를 의지가 없는 자에게 머무름을 강요할 수도 없다. 참사를 다루는 모든 이야기와 예술은 그것에 실패한다.
참사를 다루는 예술 혹은 이야기는 ‘참사의 땅’을 연다. 땅은 머무름의 장소다. 머무른다는 건 시간을 맡긴다는 뜻이다. 모든 땅은 땅 그 자체로 가치가 생겨나는 게 아니라 역사, 일시적으로 부여된 시간, 주변과의 네트워크 안에서만 가치가 생긴다. 이 땅은 아직도 곳곳에서 펼쳐지지만, 어느 것도 영속하지 않는다. 영원한 기억도 영원한 땅도 없다. 땅에서 머무르는 자와 떠나는 자가 생겨난다. 이 땅에 머무르기란 흐름을 역행하는 운동에 가깝다. 모든 예술에는 형식상의 끝이 있다. 전시의 관람 순서라는 흐름에 맞서 한 작품에 머무르기. 이미 마침표가 찍힌 글을 붙잡고 있는 응시. 연극이 끝나고 모두가 퇴장하는 극장 안에서 방금 본 연극을 반추하는 사람. 참사를 기억하는 땅은 펼쳐졌다가 흔들리며 무너진다. 이 난리통 중에 대피하지 않고 머무르는 이들은 누구인가.
0set프로젝트의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이란 연극은 서울 광화문에서 차를 타고 출발해 안산 화랑유원지 일대를 걸어 움직이며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만나 이야기하고 사운드를 듣게 되는 형식이었다. 화랑유원지에서 들은 내용도 좋았지만 정작 마음에 남은 건 다른 시간이었다. 내가 연극을 본 날에는 비가 쏟아졌다. 올라탄 승합차 안에는 스태프와 몇 명의 낯선 관객들이 앉아 있었다. 비가 와서인지 도로는 정체되었고 나는 차 맨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관자놀이를 쑤시는 통증과 함께 무거운 눈꺼풀을 잠시 열어보니 서부 간선 도로의 한 터널을 통과하고 있었다. 망막에 닿는 점멸하는 적색 신호등과 조명이 꺼진 어두운 차량 실내가 대비되었다. 꿈의 끝자락과 현실의 도입부가 겹쳤다. 꿈이 뭔지도 모르면서. 나는 유가족들이 안산에서 서울 광화문으로, 광화문에서 다시 안산으로 차를 타고 이동했을 무수한 시간을 떠올렸다. 시작도 끝도 없는 곳으로 기약 없이 왕복하며, 도착지와 목적지 어느 하나 마음 둘 곳 없는 시간. 꼼짝없다. 내가 지금 그 시간을 체험하고 있는 것인가.
오래전 촬영을 한답시고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 운전하는 차에 탄 적이 있다. 서울에서 안산으로 가는 길이었고 나는 뒷자리에 앉았다. 운전이 매우 거칠었다. 차선을 수시로 변경하며 급가속과 급정차를 반복했다. 그가 이동하고 있거나 흐르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무겁게 흘러내리는 발이 페달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나는 위험을 감지하면서도 그에게 모든 걸 맡겨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모든 걸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간이 나에게 중력처럼 세로로 새겨져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도 그런 것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의 절대적인 시간을 뺏고 싶다. 상대적이고 오래 기억에 남을 사건인 카이로스적인 시간 말고 타나토스적인 시간, 계량 가능하고 사람들로부터 직접 추출한, 신체를 가지고 머물러야만 달성할 수 있는 시간. 예술이 그걸 할 수 있나.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이 문장까지 얼마 만에 도달했을지 모르겠다. 5초나 30초, 몇 분이라면 다행이다. 오늘 나는 꽤 길게 이야기를 내뱉었다. 이 이야기도 곧 끝이다. 끝 이후에도 당신이(그리고 나도) 흘러감에 역행하며 저항하기를 바라게 된다, 어떤 태도든, 감정이든, 무엇을 알든 모르든, 참사의 땅에 몸을 집어넣고, 눈을 돌리지 않고 글이 없는 검은 곳을 들여다보길. 그 끝에 실패를 두고, 너무 머물러버려서, 무언가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는 가능성 속에서 오랫동안…….
잡말레터 S3 5호. 나는 빼앗고 싶다 당신의 절대적인 시간을 (이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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