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의 조명이 꺼지고 무대 위 조명이 켜지는 순간, 나 역시 준비를 마친다. 그러나 내가 서 있는 곳은 늘 무대의 가장자리, 주인공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의 바깥이다.
나는 수어통역사다. 내 말은 들리지 않고, 내 움직임은 누군가의 말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나는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다. 무대 바깥의 감각들을 무대 위로 끌어올리는 존재, 혹은 변방의 감각이 무대에 오르는 통로이기도 하다. 연극 수어통역은 단순히 대사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다. 통역사는 그 장면의 리듬, 호흡, 감정의 결까지 몸으로 체화해야 한다. 한 배우의 분노는 손끝에서 파열음을 내야 하고, 또 다른 인물의 침묵은 손을 멈춘 채 눈빛으로만 전달되어야 한다. 통역사는 조연도, 스태프도, 관객도 아니다. 우리는 늘 ‘존재하지만 인식되지 않는’ 위치에서 무대를 채운다. 이것은 단순히 수어라는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의 중심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강연 통역은 연극 통역과는 또 다른 종류의 긴장을 요구한다. 특히 학술 대회, 공공 포럼, 정부 주최 설명회 등에서 통역사는 ‘정보의 흐름’ 속에 있다. 단어 하나의 선택이 정책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정리되지 않은 화자의 논리를 농인이나 청인에게 ‘이해 가능하게’ 구성하는 것은 매우 정치적인 작업이다. 어느 강연에서는 발제자가 사전 원고와는 전혀 다른 내용을 즉흥적으로 풀어내며 빠르게 진행했고, 나는 말의 흐름을 따라잡기 위해 땀을 뻘뻘 흘렸다. 끝나고 한 농인 참석자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 덕분에 오늘 말들이 의미 있게 들렸어요. 강연자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느낄 수 있었어요.”
그때 알았다. 수어통역은 단지 말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옮기는 일임을. 말을 해석하는 자는 권력을 가진다. 그러나 통역사는 그 권력을 자신이 소유하지 않고, 다시 건네주는 존재다. 농인의 자리에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 흐름을 가로막지 않고 연결하는 중재자.
‘통역은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오래된 통념은 이제 변화하고 있다. 나는 점점 더, 통역사가 대화의 정중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변방에 있다. 수어통역사의 위치는 여전히 무대의 가장자리이고, 많은 공간은 여전히 통역사를 위한 자리를 ‘허락’해야만 한다. 그러나 변방은 더 이상 침묵의 공간이 아니다. 변방은 이제 무대를 다시 쓰는 자리, 감각을 재배치하는 전략의 공간이다.
잡말레터 S3 2호. 변방의 감각, 무대에 오르다 (명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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