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 하세요?” 직장 생활을 시작한 뒤로 새로운 사람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그때마다 어떤 일을 하느냐는 질문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번번이 등장했다.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어요.” 편집자라는 직업이 세간에 별로 알려지지 않아서 이렇게 말하고 난 뒤에 꼭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였다.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방식으로 반응했다. 낭만적이라고, 멋있다고, 정말 부럽다고. 아무래도 출판계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유독 지적인 이미지가 더해져서 그런 게 아닐까. 게다가 업무 시간에 책을 읽을 수 있다니, 책을 읽는데 돈이 나온다니. 책을 선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매력적인 직업처럼 느껴질 것이다. 자주 들어도 여전히 민망한 반응을 접할 때마다 나는 자조적인 농담을 섞어 대답했다. “그렇긴 한데 엄청 가난해요.” 사실 농담보다는 진담에 더 가까운 말이다. 편집자들은 대부분 가난하다. 연봉 때문에 이 업계를 떠나는 편집자들이 수두룩하다. 그럼에도 출판계에 남아 있는 편
집자들은 왜 굳이 이 업계에 남아 있기로 선택한 걸까.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가늠해 보기 위해 이 기이한 직업으로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를 한번 되짚어 보려고 한다.
이 글을 쓰기 며칠 전에 연봉 협상을 했다. 먼저 계약서에 명시된 연봉, 그다음으로 근속 연수가 눈에 들어왔다. 어느덧 이 일에 뛰어든 지 3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그리 실감나지 않았다. 어사무사하지만 그간 적지 않은 책을 만들었고 정말 다양한 저자를 만났다. 정말 다양한 저자를. 내 이름과 성을 다르게 부르는 저자, 주말에 전화해서 30분 동안 자기 원고를 토대로 강연하는 저자, 거듭 사양해도 식사 한번 하자고 집요하게 연락하는 저자, 성차별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는 저자, 숨 쉬듯이 무례한 저자…. 나를 못살게 구는 저자가, 내가 진심으로 대할 수 있는 저자보다 월등히 많았다. 첫 회사에서는 철학책을 담당했는데 주로 학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학자와 함께 작업했다. 이들은 내가 출판계를 떠나고 싶게 만든 원흉이었다. 학부 때부터 철학책을 애독했기 때문에 철학책을 만드는 편집자가 된다면 유희와 보람을 크게 느끼리라고 생각했지만 크나큰 오산이었다. 난해하고 현실과 유리된 텍스트, 당최 어떤 독자가 읽을지 가늠할 수 없는 주제, 난삽한 데다 비문으로 가득한 원고를 볼 때마다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게다가 반면교사의 면모로 가득한 저자들을 상대했으므로 나는 너무나 빠른 속도로 소진되고 말았다.
결국 입사 후 일 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퇴사를 결심했다. 퇴사 전에 마지막으로 맡은 책은 임신중지를 다루는 번역서였다. 임신중지는 당시 내게 다소 낯설고 아득한 주제였다. 하지만 번역자와 작업하면서 그 낯설고 아득한 주제와의 간극을 좁혀 나갈 수 있었다. ‘abortion’을 ‘낙태’가 아니라 ‘임신중지’로 옮겨야만 하는 당위를, 여성의 주체성과 결정권을 존중하지 않는 현실의 부조리함을 이 작업에서 깊이 알아 갈 수 있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왔을 때 나는 처음으로 출판의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약자와 소수자에게 절실히 필요한 책, 차별과 혐오와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을 위한 책을 만드는 편집자가 되겠노라고.
몇 개월 뒤 훨씬 다양한 분야의 인문서를 출간하는 지금의 회사로 이직했다. 이곳에서는 국내 여성학 연구자와 ‘젠더 갈등’ 현상을 분석하는 사회과학서를, 인도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는 마사 누스바움의 페미니즘 철학서를, 포스트 휴머니즘적 필치를 선보이는 다와다 요코의 시학 강연집을 만들었다. 실력과 인품을 겸비한 저자들 덕분에 국내외의 현실을 독해하는 관점을 배우고 다양한 사회 문제를 공부할 수 있었다. 공부는 고스란히 새로운 기획으로 이어졌다. 정치적인 의제와 연결되는 책, 우리 사회에서 시급히 읽혀야만 하는 책을 기획하고 만들 때마다 출판의 효용을 여실히 느꼈다. 새로운 계약서에 적힌 연봉은 물가 상승률이나 실적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액수였지만, 그럼에도 내가 계약서에 사인했던 이유는 이곳에서 반드시 만들고 싶은 책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인종 문제를 다루는 사르트르의 정치 수필을, 젠더 논쟁에 관한 다와다 요코의 강연집을 올겨울에는 세상에 내보이려고 한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편집자들은 원하는 책을 만들기까지 인고의 시간을 견딘다. 터무니없이 적은 연봉을 받으며 원하지 않는 저자를 상대하고 원하지 않는 책을 만든다. 몇 년 동안 씁쓸한 시간을 견뎌 낸 편집자들은 기어코 아름다운 책을 만들어 내고야 만다. 가자 지구를 위한 책을, 여성과 장애인과 아동과 퀴어와 인종적 소수자를 위한 책을, 빈곤과 기후위기에 관한 책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절박한 심정으로 호소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은 책을. 어쩌면 이 행위를 일종의 연대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자기 한 몸 건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꿋꿋이 긴실한 책을 만들고 있으므로. 그런데 이게 비단 편집자만의 이야기일까. 내게 보이지 않는 다양한 장소에서 돈으로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을 텐데. 이 이야기는 그저 고요한 연대의 일부일 뿐이다.
잡말레터 S3 1호. 고요한 연대 (호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