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입주 작가들과 진행했던 [똑-똑 빈방에 계세요?]를 읽어보았다. 인터뷰 질문 중 내내 눈에 밟혔던 것이 있었다. “당신의 최전방은 무엇인가요?”였는데, 나는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지 못하겠고 지금도 그렇다. 군부대에서나 최전방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눈에 보이지 않는 ‘최전방’이라는 게 뭘까. 내게 이것 아니면 안 되는 것? 혹은 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주는 것. 대략 이런 의미일까. 그렇다면 나의 ‘그것’은 무엇일까, 하는 단순한 질문으로 시작하여 올해 잡말레터를 구상하며 들었던 생각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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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지 않은 상태가 좋을 리 없다. 사람들은 불편함을 본능적으로 피하고는 하는데, 간혹 우리는 그것을 감내하며 마주한다.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한혹은 자학 행위라고 해두자. 그런데 어쩔 때는 불편함을 감지하고 ‘나만 그래?’라며 그것을 표출하기도 한다. 주변인들에게 나의 편치 않은 상태를 전파시키기도 한다. 그러면 그것에 동의하는 이들은 자신도 불편했다며 손을 들고 앞으로 한 발 나온다오히려 더 뒤로 물러서거나. 그럴 때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간혹 나보다 더 과하게 불편감을 토로할 때도 있어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어쩔 때는 누군가가 나를 가엾게 여겨 나 대신 상대혹은 사회를 맹목적으로 비난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판단은 모르겠고 제발 나를 지지해 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이즈음에서 나는, 왜 서로의 불편함을 직접 마주하지 않는지가 궁금하다. 어째서 ‘말해 뭐하니.’로 출발하여 ‘피하고 말지’라든지 ‘욕이나 퍼붓자’로 나뉘게 되는지 궁금하다. 이 불편함을 해결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감정을 해소하고 싶은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나는 갈등을 통해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고 믿는데, 물론 전쟁이나 무자비한 비난으로 나타나는 행태는 ‘갈등’으로 치환 될수 없다. 그것은 폭력이고 봉합될 수 없는 피해-가해의 모습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내가 말하는 갈등과는 무게가 다르다. 믿음과는 별개로 예의있는유려한 논쟁에 준비도 안 되어있고 자신도 없어 두려운 마음에 항상 ‘내가 이상한가보다’ 하고 불편한 감정을 덮고 마는 경우가 많다. 자칫하다가 상대방이 ‘실은 나도...’ 하면서 이야기를 꺼내게 될 때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발끈! 하다가도 내 태도에서는 ‘잘 못 된 것이 없었나?’ 하고 되새김질을 하는 중에 감정의 농도가 연해져 어느 순간에는 ‘그럴 수도 있지 뭐’ 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게 될 때가 있는 것이다. 조금 더 자조적으로 이야기해 보자면 갈등과 갈등 속에서 서로에게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라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언제나 내가 옳을 수 없다. 그리고 누구도 상처 되는 말부터 들어야 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각자의 최전방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안전지대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우리는 각자 너무 다양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삐거덕거리던 마음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무마되고 말 때, 그렇게 쌓이던 감정은 곪기도 하고 자연스레 사라지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새 완전한 트라우마가 되어 본능적으로 피하게 될 때가 있다나는 참는 게 좋은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모두가아니 사실은 내가 괜찮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참지 않는다. 너무나 긴장되어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상황일지라도, 말하고 요청한다.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혹은 "고쳐주세요.", "저는 이렇게 느껴져요"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사실 개인과 개인의 문제는 무시하든 해결하든맘 비우고 상처만 주고받던 내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그게 개인이 아니라 더 큰 상대라면 어떨까. 내가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상황들이라면 나는 최전방의 최전방에서 방아쇠를 당기게 될 지, 날아오는 총알을 맞고만 있을지 혹은 무시하고 내 갈길이나 가게 될지 모를 일이다. 개인의 영역에서 사회적 영역으로 확장되었을 때는 당연히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어쩌면 "말해 뭐하나? 바뀌기는 하나?" 의 무력감을 경험한 사람들이 오히려 개인과 개인의 갈등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솔직히 말해 그런 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나는 내 말을 발사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내 속의 부대낌을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일까? 주체할 수 없는 화? 슬픔? ... 어쩐지 여기까지 쓰고 보니 [똑-똑 빈방에 계세요?]에서 말한 질문은 “당신의 최전방은 무엇인가요?”였는데, “당신은 최전방에서 어떤 자세로 서 있나요?”로 멋대로 해석해 버리고 글을 써버렸다이럴수가 어쩔 수 없다. 이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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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이나 내용에 있어 지금까지의 변방연극제가 ‘편함’만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불편한 사실과 내용을 함께 듣고 나누고자 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생각할 거리를 건네거나혹은 냅다 던져버리는, 미간을 한껏 꾸기면서 상념에 젖게하고, 옆에 앉은 누군가와 첨예하게 그 이슈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많아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변방'은 갈등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런 이유로 이 단어가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한 가장 경계에 있는 곳이며, 날카롭고 예민한 곳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게 될 때 가장 흔들려야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흔들림 속에서 경계가 경계를 만나 허물어질 때 나오는 복잡한 이야기가 축제에서 가져가야 하는 내용이지 않을까?이 또한 개인적인 의견 그다지 외부로부터 안전하지 않지만 어떤 이야기든 발사할 수 있고 맞아낼 준비가 되어 있는 '불편한' 곳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결코 축제가 어떤 갈등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변방연극제는 말 그대로 '변방'일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앞서 말한 것 처럼 갈등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서 이야기를 할 수 있게끔 북돋아주는 하나의 장場인 것 같다. 그런 이유로, 변방에서 멀리 떨어져 너무나도 중심에 가까운 이야기보다는 그냥 그 언저리에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주목받지 않았고 그냥 늘 있던 이야기처럼 너무나도 평범하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변방과 변방이 모여 외롭지 않도록 축제가 이어진다면 좋겠다. 불편함을 기꺼이 수용하고 갈등을 풀기 위해 '시도'하려는 단단한 주체가 된다면 좋겠다! 불편함을 편히 이야기할 수 있는 축제가 되었기를 바라고 개개인의 이야기가 무마되지 않고 잘 주고 받았기를 바란다. 각자의 최전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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