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존재는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만큼이나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들었고 무엇을 상상하느냐에도 달려있다. 이 이야기 안에는 숨어 있는 사냥꾼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한번 사로잡힌 이야기에서 헤어 나올 수 없고 우리 삶은 우리가 들었던 이야기들의 결론이다."
-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정혜윤, 위고, 2021
누군가 F에게 물었다.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그는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고 했다. 미얀마 소수민족 *로힝야 출신인 그는 2007년 미얀마 군부에 의한 소수민족 탄압과 박해를 피해 한국에 들어왔다. 2% 남짓의 (낮은) 난민 인정률을 자랑하는 한국 정부에서, 그는 애당초 '난민인정자'로 한국에 초대됐다. 행운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행운이었다. 2021년 한국 국적까지 취득해 엄연한 한국 '국민'이 된 그이지만, 17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 앞에 서면 '집'을 언급한다. 남편과 무럭무럭 자란 세 아들이 함께 있는 이곳인데도 말이다. 누군가 손을 들고 그 말을 받아쳤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니까(실제로 미얀마 내전은 악화되고 있으며,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은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말들이 사실 좀 현실감 없고 단순하게 들리거든요. 국제사회와 한국 시민사회가 (긴 설명이 이어졌지만, 사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특정할 수 없는 불편한 공기로 가득 채워진 공간을 어떻게 환기시켜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F는 '그렇지만 제가 진짜 원하는 건 정말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집에 가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배고플 때(마음이 허기질 때)마다 동네 친구 M을 찾는다. 벌써 몇 해째 그의 집에서 저녁(마음)을 빚지고 있는데, 그는 2010년 결혼을 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그간 두 아들을 낳았고, 안정적으로 가정을 꾸렸다. 아쉬울 게 없다고 했다. 그는 2년에 한 번, 자신의 두 아들을 데리고 모국을 방문한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후엔 한동안 연락이 뜸하다. 그는 모국에 다녀오면 이상한 감정이 올라온다고 했다. 여기(한국)도, 그곳(모국)도, 집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자주 어디에 있어도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다고 느낀다. 특정한 물리적 장소나 일터에서도, 사회적 관계망이나 일대일 관계에서도, 심지어 가끔은 혼자일 때도 그렇다. 자격의 문제이기도 하고, 능력이나 기호의 문제이기도 하며 실은 마땅한 이유가 없기도 하다. 그렇게 '어디에도 안착시키지 못하는 이 이질감은 무엇일까?' 그런 질문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이질감, 이질감은 어디에서 올까. 반대로 순수, 동질성과 동일성, 단일함, 통일성, 질서와 체계, 안정은 안전한 집의 충분조건이 되어줄 수 있을까. 가능한 일이긴 할까. 결국은 모두가 이렇게 붕 떠 있는데.
그러니까 그런 때에 나는 우리가 서로에게 '있어 주는 것'만으로 완전할 수 없으며, 오롯이 함께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휩싸인다. (처지와 상황에 대한 판단을 차치하고) 자의든 타의든 우리를 안착시키지 못하는 이질감과 세계의 불완전함이 각자의 삶을 이렇게나 지배하고 있는데, 서로를 구원하지도 해방시키지도 못한다는 사실이 느껴질 때마다 일종의 비극처럼 다가온다. 그런데도 끝내 그런 결론에 다다르면 절망보다 희망에 가까운 느낌이다.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
우리는 가끔 '완전함'을 명분으로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 같다. 유토피아와 같은 완성형 세계에 비춰 결국은 실패할 문제라며, 이질적인 것들을 쉽게 등한시하고 내친다. 동시에 쉬운 포기는 혐오의 메시지에 너무 쉽게 포섭된다. '무슬림은 위험해', '결혼이주여성의 삶은 불행해', '난민은 가짜야.', '이주노동자는 범법을 저질러' 어떤 사람들은 그저 '무슬림', '결혼이주여성', '난민'으로 명명될 뿐, 삶에 대한 해석의 기회를 박탈당한다. '불쌍한', '불행한', '무능한', '무력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은 대상으로만 남게 된다. 한 사람의 결은 그렇게 소거되고 우리는 영영 만나지 못한다.
대상이 된 이들은 높은 확률로 수단이 된다. 이 세계는 그들에게서 '생산성' 따위를 운운하며, 사회의 성원이 될 수 있는지 자격을 논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나부터도 강박적으로 찾게 되는 '생산성'과 '자기증명', 그러니까 내가 나를 소외시키는 꼴과 비슷한 모양새다. 이 세계는 우리를 너무 쉽게 그런 상태에 노출시키고 방치해 둔다. 나를 소외시키고, 서로를 소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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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서사적 존재라며 모든 것을 이야기로 풀어내기를 바라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가 다 들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소비되는 이야기가 있고, 그렇지 않은 이야기도 있다. 변두리의 존재들만큼이나(사실 대개의 경우 변두리에 있긴 하지만) 이야기는 너무 많은데 들리는 이야기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종종 특정 대상에게 특정 내러티브를 기대하기도 한다.
한 사람의 불행과 비애, 고통은 어떻게 전달되어야 할까. 또한 들려지는 이야기는 왜 들려지고, 들리지 않는 이야기는 왜 들리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전달자의 책임인가 아니면 독자/청중/관객의 몫일까.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어떤 행위일까. 전달하는 과정에서 가공되고, 읽히는 과정에서 해석되며 오염되는 것은 없을까. 한 사람의 삶을 반추하는 이야기라면 응당 그런 태도에 대해 반성해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사실 이야기의 온전한 전달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이야기를 듣는 독자/청중/관객으로서 갖춰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어떤 이야기를 바라야 할까. 애초에 바람이랄 게 없어야 할까. 나는 종종 그런 질문에 멈춰있을 때가 있다.
집은 어디일까. 어떤 곳이어야 할까
다시 집을 생각해 본다. 이질적인 것에 대한 온전한 환대와 수용이 우리가 원하는 집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온전한 환대와 수용은 가능한 일일까? 지속 가능할까? 잘 모르겠다. 결국 확보되지 못한 입장의 동일성으로 서로에게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지고 마는 형국일 확률이 높다. 그런데도 '소외'를 방치해두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미끄러짐'이 낫다. 그것이 '함께'하려는 서로를, '공존'하려는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혹은 대안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미끄러지는 과정 자체가 곧 연루의 과정인 것만 같다.
그러니 나는 이왕이면 불행과 비애의 이야기들이(물론 우연한 행운과 이따금의 환희에 찬 이야기들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 더 넓고 깊게 우리의 삶에 포진해 있기를 바란다. 어차피 미끄러져야만 하는 일이라면 그런 이야기들이 발에 채듯 산재해 있고, 무심코 떠오르고 밝혀지기를 바란다. 그렇게 각자의 이야기가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서로의 경계를 마모시키고 포개며 중첩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오히려 완전하게 함께할 수 없다는 절망이 우리의 절대 한계를 깨닫게 하고 우리의 실천을 견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연결과 연대의 동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엔 그것으로 전이될 어떤 경험과 감각이 나를, 당신을, 우리를 고립과 비극으로부터 조금이나마 해방시켜주지 않을까. 어떤 땐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희망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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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우리가 들었던 이야기의 결론'이란다. 맞다. 어떤 이야기에 노출되어 살고 있는지가 결국 우리의 삶이다. 그러니 이야기의 풍요 속에서 나는 나부터 어떤 이야기에 접촉되고 연루되며 전달하는 삶을 살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더 많은 날 것의 변방의 이야기들, 그러니까 그것이 불행과 비극의 이야기든, 행복한 이야기든, 싱겁고 삼삼한 이야기든, 혹은 서사적 구조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이야기든(나는 대체로 우리의 삶이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이야기든 들려져야 할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떠오르고 드러나고 밝혀지기를 바란다. 그럴 수 있도록 이 세계가, 우리의 무대가, 내가 준비되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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