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막 문화예술계로 들어서던 때, 내 꿈은 전국을 유랑하며 우리나라의 모든 축제에서 일해보는 것이었다. 왜 하필 축제였냐고 묻는다면, 대한민국 어디든 축제가 없는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축제는 한정된 기간, 한정된 지역에서만 열린다는 전제가 있었기에 이방인, 유랑자로의 삶을 꿈꾸는 나에게는 가장 적합한 일터라고 느껴졌다. 축제가 열리는 일정 기간 특수한 지역에 머물고, 다시 일을 찾아 떠나는 그런 삶. 영화 <백만엔 걸 스즈코>처럼 여기저기를 따라 흐르며, 어디에도 닻을 내리지 않고 평생 이방인으로 살고 싶었다.
대한민국에는 실로 많은 축제가 있다. 각 지역의 특산물을 내건 먹거리 축제부터 계절의 특징이나 관광명소의 이름을 딴 축제, 그리고 특정 지역에서 열리는 영화제, 공연예술축제, 음악제, 미술제 등등. 그 축제 들의 목록을 가만히 살펴보고 있으면 축제라는 의미가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나고 자란 인구 30만의 소도시 또한 자칭 ‘축제의 도시’로 정말이지 일 년 내내 크고 작은 축제가 연이어 열린다.
사전에 정의된 바대로 나름 한국의 축제를 이해해 보자면, ‘1년에 한 번 일정한 기간 동안, 특정 지역에서 특정한 정체성을 담은 다양한 규모의 행사’ 정도가 아닐까? 그러나 무언가를 축하한다거나 기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축제들은 매우 극소수이거나, 있더라도 그 의미가 희미해 보인다. 이름만으로 정체성이나 의미를 가늠하기 어려운 축제들을 구분하게 해주는 것은 지역의 이름일 것이다. 그것만큼은 명확하고 바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축제를 따라 유랑하는 사람으로 살기를 희망하며 가장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서울이었다. 왜냐하면 나에겐 작은 ‘서울판타지’가 존재했기 때문인데, 그 시작은 라디오였다.
당시 좋아하던 아이돌의 스케줄을 확인하며 그들이 출연한 TV 프로그램이나 라디오 방송을 챙겨서 보고, 듣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는 아이돌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은 기본 전제였으므로 내 아이돌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방송프로그램이 전부였다. 스케줄표에 나온 라디오를 듣기 위해 주파수를 맞추면 치지직 거리는 소음만 들릴 뿐, 아무리 안테나를 흔들어도 듣고 싶은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처음으로 지역에 산다는 씁쓸한 좌절감을 맛보며 지역에는 ‘없고’ 서울에는 ‘있다’는 갈망, ‘서울 판타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서울로 상경해 머물고 일하며 그간의 갈증이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양한 지역에서 온 수많은 또래 친구들, 규범을 벗어난 삶과 개성, 무엇보다 내가 꿈꿔오던 대안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대학로와 홍대거리, 시청광장, 한강, 동대문과 광화문을 지날 때면 비로소 내가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 편입되었다는 소속감을 느끼며 종종 벅차오르는 오타쿠의 마음이 되기도 했다.
서울살이중에도 여전히 출신 지역은 꼬리표처럼 붙었고, 그것은 나를 이루는 캐릭터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 저러한 이유로 축제처럼 전국을 유랑하는 생활을 마치고 다시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뱁새 씨는 이 동네 사람 같지 않아요. 서울 사람인 줄 알았어요.’라는 말이다. 상대는 칭찬의 뜻으로 한 말이었겠지만 나는 이 말이 가진 의미를 계속 곱씹게 된다. 왜 서울 사람 같다는 말을 칭찬으로 하는 걸까?
지역에는 여전히 서울에 대한 열패감과 좌절감, 무기력, 무조건적인 서울숭배가 여전히 남아있다. 지역 사람들을 만나면 종종 자신이 ‘서울’출신 이란 것을 강조하거나, 적어도 ‘수도권’ 생활을 하다 ‘지역’에 왔음을 강조하며, 자신이 이 지역 사람들과 다름을 내세운다. 실제로도 지역 출신보다 서울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더 우호적인 분위기가 있다. 이것은 흔히 ‘인서울’로 일컬어지는 학력 줄 세우기와 같은 엘리트주의와도 맞닿아있을 것이다.
뉴스에서는 주기적으로 지역 소멸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실제로도 그렇다. 초등학교가 폐교하고 얼마 남지 않은 젊은 사람들은 일거리를 찾아 서울로, 수도권으로 떠난다. 지역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지자체는 축제나 문화, 예술을 대안으로 내세우곤 한다. 그리고 그것의 성공 여부는 역시 서울(수도권) 방문자들의 숫자거나, 서울(수도권)에서 정착한 사람의 숫자일 것이다. 꼬리표를 떼고 싶어 하는 지역 예술가, 지역 출신들에게 서울은 끝없는 갈망의 대상, 인정의 중심축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우리에게 다른 대안은 없을까? 우리는 모두 서울이 되기를 꿈꾸는 걸까? 전국이 서울화를 꿈꾸며, 서울 최고를 외칠 때 우리가 잃게 되는 건 낡고 촌스럽고 불편하고 뒤떨어졌으며 시대착오적이라고 불리는 지역의 고유성이다. 그것이 맞는 걸까?
요즘 드는 생각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래된 것을 무너트리고 새로운 건물을 지으며 서울의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름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지역의 고정된 위계를 무너뜨리는 것, 바뀌지 않는 질서에 질문을 던지는 것, 동시대의 감각을 깨우고 지금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공명할 수 있는 사람들과의 연결이 가장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저 물리적인 연결보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