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우연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던 경험이 있나요? 당시에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그 사건들의 의미를 되짚어보면서 일련의 흐름을 발견했던 일이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시간을 4년 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온 세상이 바이러스로 시끌벅적했던 2020년을 저는 조금 다르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해 1월, 재미공작소에서 하는 키라라님의 전자음악 수업을 들었는데 첫 수업에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성정체성을 밝혔던 것이 기억납니다. 봄에는 일민 미술관에서 레즈비언의 방을 컨셉으로 한 한솔 작가의 작품 <Boys don’t cry>를 보았고, 같은 시기에 한창 대만 영화와 책을 찾아보며 <남색대문>, <황인수기>, <악어 노트> 등 퀴어 소재의 작품들을 자연스레 접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대만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동성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국가라는 사실과 이것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퀴어 커뮤니티와 거리가 멀었기에 이 모든 것들이 말하는 세계가 저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외부자의 시선에서 오로지 순수한 호기심만으로 그들이 사는 세상을 관찰하려 했던 것 같아요. 단순한 호기심이라 치부했던 것이 사실은 자연스러운 끌림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끌리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이 받아들임은 필연적이었어요. 일단 인정하게 되자 제가 몸담고 있던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껏 당연하게 여겼던 가치와 규범 이면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뜯어보기 시작했어요. 가정폭력을 다룬 영화 <미쓰백>과 고독사를 소재로 한 박혜수 작가의 작품 <후손들에게>를 통해서는 혈연 가족의 한계와 어두운 일면을 볼 수 있었고, 같은 작가의 작품 <퍼펙트 패밀리>와 성인 입양에 관한 글을 통해서는 대안 가족에 대해 상상해보게 되었으며, 책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를 읽고 비혼 여성에게 부과되는 돌봄 노동과 젊고 건강하지 않은 몸이 처한 사회적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렌즈로 들여다보니 혈연 주의, 정상 가족에 대한 환상, 성역할,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에 대한 집착까지 세상엔 온통 기이한 것 투성이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를 가장 크게 뒤흔들었던 것은 무성애와 강제적 섹슈얼리티 개념이었어요. 무성애는 성적 욕망의 유무와 관계없이 욕망의 대상이 없는 경우를 말합니다. 무성애를 말할 때 흔한 오해 중 하나가 바로 성욕과 성애를 혼동하는 것인데요. 성욕은 말 그대로 성적 욕망, 내재한 성 충동을 말한다면 성애는 그 욕망의 방향, 욕망의 대상을 내포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무성애는 욕망의 유무가 아닌 욕망하는 대상의 유무에 따라 구별됩니다. <무성애를 말하다>의 저자는 무성애 여성이 “욕망의 대상 자의식(Object-of-Desire Self-Consciousness)”이 없기 때문에 덜 여성적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성애 여성은 자신을 욕망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반면 무성애 여성은 이런 자의식이 없기 때문에 여성적으로 보일 필요를 못 느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욕망 당하고 싶은 욕망이 없는 것이지요. 엉켜있던 실타래가 풀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친구들이 타인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포인트를 말할 때 공감할 수 없었던 이유를 스스로에게도 설명할 수 없었는데 비로소 답을 찾을 수 있었어요.
이런 저에게 각종 연애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SNS를 도배하는 현상은 조금 기괴해 보였습니다. 왜 연애 안 하냐는 질문을 숱하게 들어온 저로서는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연애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고 할까요. 책 <에이스>에서는 이처럼 섹슈얼리티가 만연한 사회적 분위기를 “강제적 섹슈얼리티(compulsory sexuality)”로 설명합니다. 섹슈얼리티는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한 요소로 여겨지기에 모두가 성적인 존재임을 가정하고 성적 매력을 드러낼 것을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적이지 않은 존재는 어딘가 모자라게 비치고, 반대로 젊고 건강한 성인은 당연히 성적 존재라는 기대를 받게 됩니다. 곧 섹슈얼리티는 정상성과 결부됩니다.
이렇게까지 연애와 섹슈얼리티가 중요한 이유는 섹슈얼한 관계가 가지는 의미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생의 동반자는 섹슈얼하고 로맨틱한 관계여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있고 그렇지 않은 관계는 우정으로 간주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전자는 언제나 후자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요. 주거와 경제를 공유하는 동반자는 언제나 성애적 관계여야 할까요? 헨리 제임스의 소설 <보스턴 사람들>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소설에서 유래된 "보스턴 결혼"은 19세기 후반 보스턴에 거주하던 여성 사이의 동거 관계를 지칭하는데요. 당시 일하던 여성들에게 이 결혼은 굉장히 합리적인 선택지였다고 <보스턴 결혼>의 저자는 말합니다. 이 관계는 경우에 따라 성애적이기도, 비성애적이기도 했으며 “인생에 '중요한 타인'을 둠으로써 얻는 이점은 전부 있으나 이성애에 따라붙는 짐, 다시 말해 진취적 직업 여성의 삶을 이룰 수 없게 만드는 제약들은 없었다."고 해요. 또, 과테말라와 사모아, 멜라네시아 문화에는 ‘로맨틱한 우정’으로 불리는 비성애적이지만 가까운 관계가 있었으며 오히려 “결혼은 대개 사랑하는 짝과 맺어지는 것보다 경제적 동반자 관계에 더 가까웠다”고 합니다. 지금의 결혼 동반자와는 사뭇 다른 모습인 것 같습니다. 우리도 더 다양한 형태의 관계를 상상하고 만들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기존의 것을 낯설게 하기. 원래 알고 있던 것 혹은 믿고 있던 것을 비틀어 보기. 그것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이자 예술이 가진 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만난 여러 작품들이 예상치 못하게 저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듯 이번 연극제가 여러분에게 새로운 전이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잡말레터 S2 2호. 예상치 못한 새로운 세계를 만났을 때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