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만화, 호빵맨을 기억하시는 분 계신가요? 오래전 텔레비전에서 방영했던 만화인데 한국판 이름은 호빵맨이고, 일본에서는 앙팡맨으로 불려요. 호빵맨의 탄생 신화를 잠깐 알아볼까요. 평화로운 어느 날, 호빵을 만들기로 한 잼아저씨는 여느처럼 오븐에 빵을 넣고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별똥별이 쏟아지더니, 별똥별 하나가 잼아저씨네 굴뚝으로 침입해서 오븐 안에서 구워지고 있던 호빵에 퐁당 들어가요. 그렇게 엉성하고 수상하게 탄생한 빵이 바로 호빵맨이예요. 같은 날, 호빵맨의 영원한 천적이자 단짝인 세균맨도 태어나고요. 호빵맨은 정의를 위해서라면 굶주린 사람이 있는 곳까지 날아가서 맨손으로 자기 머리를 떼어내 먹여요. 심지어 친구들은 그걸 받아서 진짜 빵처럼 맛있게 먹어요. 머리가 사라지면 힘을 잃게 되고, 빵 굽는 잼아저씨가 구운 새로운 머리로 대체가 됩니다. 기운을 차린 호빵맨은 다시 자기 머리가 필요한 배고픈 사람들을 찾아다닌다는 이야기예요.
호빵맨 머리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어요. 호빵맨 얼굴에는 팥 앙금이 들어가 있는데, 팥이 없는 날에 경단 재료를 넣으면 경단맨이 되고, 만두소를 넣으면 찐빵맨이 돼요. 머리에 어떤 재료를 넣느냐에 따라서 호빵맨의 능력이나 성격, 말투가 바뀌기도 하고요. 게다가 만화에서 잼아저씨, 버터누나, 세균맨, 짤랑이 모두 식사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호빵맨은 밥도 전혀 먹지 않고, 쉬는 날도 없이 매일 일만 해요. 얼핏 보면 따뜻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호빵맨은 태어난 일화도 수상하고, 머리 성분도 제각기이고, 자기 몸은 전혀 돌보지 않으면서 비현실적으로 이타적이고 헌신적인 존재더라고요. 한때 유행하던 기버(giver), 테이커(taker), 매쳐(macher) 중에서 전형적인 기버에 해당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호빵맨처럼 자신의 힘을 잃어가면서까지 타인에게 얼굴을 떼어 주는 일이 정말로 가능한가요? 요즘 같은 세상에서, 타인을 위해 기꺼이 나의 것을 내어주는 일에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진짜 있을까 싶어서요. 어쩌면 제가 호빵맨 같은 사람이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의 저는, 스스로의 안위보다 타인의 안위가 우선인 사람이었습니다. 나의 헌신이 누군가의 마음을 구원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거든요. 구원에는 당연히 희생이 필요하다는 믿음과 함께요. 내가 타인을 구할 수 있다니 얼마나 오만한 마음이었던지요. 게다가 100%의 순수한 희생과 헌신의 마음은 아니어서,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의 동굴 한켠에는 당신에게 내어 준 마음만큼은 아닐지언정 십분의 일 정도는 돌려받고 싶다는 어떤 기대감과, 그것조차 보상받을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한 억울함이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깊은 내면에만 존재하는,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어둡고 음침한 마음이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내 안의 다양한 욕망의 주체들을 억누르고 살아왔는데, 결론적으로는 저에게도, 제가 위하고 싶었던 존재들에게도 쉽사리 지워지지도, 가려지지도 않는 상흔으로 남았습니다.
그런 시간을 겪고 나니 더는 사람에게 제 마음을 내어 주고 싶지 않았어요. 마음을 줘서 뭐 하겠어요. 어차피 부서지고 사라질 인연인데. 연약한 마음의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적당히 친절하고 다정한 얼굴을 쓰고서, 서로가 서로의 세계에 침입할 수 없도록 적절히 거리감을 유지하며 그렇게 스스로를 외로움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아니 실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해결하지 못한 마음의 숙제를 해결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제가 가진 비열하고 추악한 마음, 끝없는 자기혐오를 어느 정도 있는 그대로 직면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자기 자신을 잃어가면서까지 타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다는 것도요. 저의 노력만 있었던 건 아니고요. 저의 어둠을 알아봐 주고, 조용히,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곁에 머물러준 존재들 덕분에 모든 면을 드러내는 글쓰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는 저의 바닥을 내보이는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올해 서울변방연극제의 주제가 취약하고 오염되고 더러운 것들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이후 연극제의 키워드를 통과하면서도 연극제에 소개되는 작품들과는 무관한 이야기들을 잡말레터를 통해 나왔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을 때, 솔직하게 말하면 반가운 마음보다는 막연한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첫 번째는 아무리 자유분방한 레터의 형식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공적 플랫폼에서 어떤 이야기를 얼마만큼 드러낼 수 있을까, 혹은 드러내는 게 맞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요. 두 번째는 연극제 라인업이 공개되면서 축제가 세 가지 키워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해 볼 수 있었는데, 어느 필자의 해석처럼 취약하고 오염되고 더럽다고 손가락질받는 존재들을 위한 축제를 표방한 것이라면, 적어도 저에게는 프로그램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대단히 새롭거나 긍정의 의미로 다가오진 않았어서 (죄송해요) 고민이 컸습니다. 잡말레터 역시 서울변방연극제를 통해 나오는 뉴스레터라서, 작품들이 내는 목소리와 완전히 다른 지향점을 가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탈서울, 탈극장 실천이 흥미로워서 글로 좀 풀어내보고 싶었는데 그사이 등장한 좋은 리뷰들 덕택에 한 풀 꺾였네요.
아무튼 올해 축제가 표방하는 키워드에 대해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도 한 번 읽고 공중에 날아갈 만큼 가볍지만은 않은, 나름의 의미가 있는 잡스러운 말들을 어떻게 잘 풀어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레터를 쓰는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때문에 어떤 글은 일상에서 한 번쯤은 생각 해 봄직한 이슈를 던지는 정도의 글이 되었고, 어떤 글은 제 내면의 분노와 우울을 들췄다가 주워 담지 못해 감정이 넘쳐흐르는 글이 되었어요. 어느 노래 가사처럼 내 속에도 내가 어쩔 수 없는 내가 너무 많아서 그랬던 거니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좀 더 깊이 다루고 싶었던 주제들이 있었는데요, 예컨대 무성애라던가, 인간이 아닌 동물의 죽음, 최근에 드라마로 만들어진 마스크걸, 나만의 성적 페티쉬, 예술적이고 미학적인 연극계에서 변방 취급하는 상업연극에 대해, 말의 오염의 역사, 기안84가 마신 갠지스강 이야기, 여성 홈리스 등 언젠가 풀어낼 기회가 닿겠지요. 어쩌면 이번 잡말레터를 계기로 새로운 곳에서 계피 혹은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별 거 아닌 마음을 읽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별 일 없이 사는 게 쉽지 않은 요즘이지만 별 일 없이 잘 지내시기를, 그러다 언젠가 또 만난다면 반갑게 인사 나누어요.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