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s better to have loved and lost
Than never to have loved at all.
사랑하고 잃는 것이 더 낫다는 것,
결코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 알프레드 테니슨 (「사랑하고 잃는 것이 더 나으리라 - 아서 헨리 할람을 기리며, 제27편」 중 부분)
언젠가는 꼭,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말하자면, 삶의 유한함을 깨달은 후 외면할 수 없게 된 몇 가지 사실들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 삶이 유한하고 타인의 삶 역시 그러하며, 그래서 우리의 생명은 서로 무게를 비교할 수 없이 모두 귀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은 몇몇 사람들에 대해서. 타인의 지속되는 고통보다 자기의 지금 기분이 더 중요한 사람들, 땅에 묻히는 쓰레기와 하늘에 태워지는 쓰레기들을 못 본 척 하는 사람들, 사람이 죽든 말든 지금의 돈벌이가 더 중요한 사람들, 아까운 일 분 일 초의 시간들을 타인을 조롱하고 괴롭히는 데 쓰는 사람들, 몇십 년간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을 만큼 부를 축적하고도 더 벌기 위해 약자를 속이는 사람들. 부끄러움을 너무 몰라서, 보는 내가 더 낯이 뜨거워지는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걸 보면서, 진심으로 의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혼자 영원히 사는 거야? 삶을 그렇게 낭비해도 아깝지 않은 거야? 자기가 죽은 다음에도 세상이 계속 이어진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런 사람들이 나와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류 공통의 공포 중 하나인, 겉 껍데기만 인간이고 속 알맹이는 전혀 다른, 그런 어떤 존재들처럼 느껴진다. 아니다, 내가 그런 존재일 수도 있겠다. 운 좋게 발각되지 않은 것일 뿐, 나의 알맹이는 이미 변이된 상태인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할 수 있는 만큼 길게 말줄임표를 잇고 싶다. 질문의 모습을 한 탄식이 쭉 이어지는 상태, 그게 나의 요즘이기 때문이다.)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을 혹시 읽어본 사람이 있다면, 그 책에 전반적으로 드리워진 검푸른 암울함을 기억할 것이다. 그 이유로 그 책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정말로 좋아한다. 그 때 나오는 생물 중, ‘세스트랄’이라는 생물이 있다. 사실 1권에서부터 등장했지만 그 때의 해리에게는 보이지 않아 작품에 묘사되지 않는데, 5권 이후부터는 해리(와 독자들)에게 중요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 생물은, 죽음을 목격한 적 있는 사람에게만 보인다. 세스트랄이 보임으로 인해서 해리는 내가 본 것이, 경험한 것이 죽음이 맞았구나, 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것은 마법 생물과 함께 살아가지 않는 머글(*<해리 포터> 세계관 안에서 마법사가 아닌 사람을 뜻함)인 우리에게도, 이해하기 쉬운 비유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후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되는 순간을 표현한 것이다. 부모가 사망하는 순간에 곁에 있었던 해리였지만, 죽음이 죽음인 줄 몰랐던 아기 때였으니 그것은 해리에게 상실일 수 없었다. 해리가 마음을 주고,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는 존재였던 이가 떠났을 때, 오히려 덜 직접적인 목격이었을 텐데도 그것이 해리가 느낀 최초의 깊은 상실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 해리는 세스트랄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니 그 작품에서 등장한 죽음, 그리고 내가 이토록 생생하게 삶을 인식하도록 만든, 이런 기묘한 변이를 겪게 한 죽음은, 심장이 멈추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한 인간의 감정을 흔드는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이전과 그 이후를 나누는, 선이 그어지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나의 지금을 만든 상실들은, 나와 그 전까지 깊게 연결되어 있던 사람들의 죽음이 아닐 때가 더 많았다. 나는 가까운 이가 교통사고로 떠났을 때에도 정말 크게 아팠지만, 무대와 객석이라는 각자의 자리에서만 만나서 내 이름도 알지 못했을 이가 떠났을 때도 진실로 고통스러웠다. 성장기를 함께한 스승이 떠났을 때에도 악을 지르며 울었지만, 제주도로 수학 여행을 떠나던 고등학생들이 끝내 전원 구조되지 못했을 때에도 밤새 울었다. 그렇게 알게 되었다. 꼭 얼굴과 이름을 아는 사람들의 죽음만 내게 영향을 주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시간대와 서로 다른 지역에서도, 그동안 무수히 쌓여 간 외롭고 쓸쓸한 죽음 앞에서 함께 애도한 사람들은 언제나 여러 명이었을 것이다. 같은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같은 안타까움을 느끼고, 같이 눈물 흘렸을 것이다. 마치 감각기관이 연결된 사람들처럼. 나는 나도 모르는 채 이 커다란 영역 안에 성큼 들어와 있었다. 연루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2022년 말, 4.16재단에서 공모사업 접수를 받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최근 몇 년 간 했던 일 중에 가장 마음을 담아 했던 <공적 애도의 쓸모> 사업의 시작이었다. 공모사업 제안서를 작성하며, 나는 청년 인구의 소실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다고 썼다. 청년들은 일터에서, 집에서,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그냥 어느 곳에서나, 자기에 의해서든 타인에 의해서든, 여럿이든 혼자든 수시로 죽었고, 그것에 대해 몇 달이든 몇 년이든 슬퍼하며 다시는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노력해야 마땅할 이 사회는 계속 그대로였다. 나는 슬펐지만 그보다 더 크게 화가 났다. 그렇게 단숨에 사업 제안서의 서두를 쓴 적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2023년과 2024년, <공적 애도의 쓸모>를 통해 나와 동료들은 ‘공적 애도’라는 단어를 이 사회에 더 많이 알리고, 그것의 쓸모를 찾기 위해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영상을 만들고 법을 공부하고 노래를 듣고 영화를 보고 축제를 열고 그림을 그리고 나비를 접고 편지를 쓰고 시를 낭독하고 매뉴얼을 제작하고 밥을 같이 먹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얼마나 애도할 장소가 부족한지를 알게 되었다. 사회적 참사 이후 만들어진 추모의 공간들은 언제나 임시적이었고, 그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관계자들이 끊임없이 싸워야만 했다. 애도의 시간 역시 한 번도 충분한 적이 없었다. 2022년 10월의 ‘국가애도기간’은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감정 흐름을 모두 단절시켜 놓았고, 그 기간 동안에 예정되어 있던 공연이나 행사는 죄다 취소하게 했다. 애도의 방식까지도 국가가 통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니 자기 마음을 돌볼 수도, 서로의 마음을 들어줄 수도 없었다. 애도의 시간과 장소에 대한 절실한 필요가 이미 쌓이고 있었고, 나는 그 마음들이 흘러다닐 수 있도록 통로를 연 것 뿐이었다. 사람들이 만나서, 같은 노래에 귀 기울이고, 서로 아무 말 없이 부둥켜 안고, 침묵 속에서 생각을 하고, 손을 맞잡고 온기를 나누는 장면을 바라보며, 부정할 수 없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서로의 환경이다. 완벽한 타인은 없으며, 절대적인 바깥도 없다.
해리 포터가 그랬듯, 내가 그랬듯,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기나긴 말줄임표)…?”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면서 애도의 공동체에 연루된, 모두를 환영한다. 알프레드 테니슨은 친구를 잃고 기나긴―133편에 이르는―시를 썼다고 한다.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진은영 시인도 세월호 참사 이후 꾸준히 시를 쓰고 발표한다. 상실과 애도의 글이다. 하지만 “지극한 사랑의 말들”(*마찬가지로 애도의 의미가 담긴 <작별하지 않는다>의 작가 한강의 말에서 따 왔다)이기도 하다.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도 그렇다. 죽음에 대하여, 자기가 언젠가 죽는다는 걸 망각한 채로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을 낭비하고 있는 이들에 대하여 쓰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런 글을 써 버렸다.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면 어쩔 수가 없다. 이렇게 귀찮기 그지없는 연결. 그러나 조금쯤의 쓸모는 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진다는 것. 우리에게는 지극한 말들이 많이 남아 있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또 다른 이들의 서사를 기대한다. 거기에 아낌없는 환영을 쏟아붓는 것이, 내 생을 생생하게 쓰는 아주 좋은 방법일 것 같다. |